“어이, 지 연구원! 이것 좀 봐봐. 음~, 아, 잘 만들었네. 괜찮은데!”
동료가 세미나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나에게 가지고 와서 은근히 자랑하였다. 당시 교육이나 세미나 프로그램으로 산업계에 히트를 좀 치고 있던 터라 동료 연구원들에게 부러움을 좀 사고 있었다.
“한 100명은 오겠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음, 좋아, 좋아! 드디어 한 건 하겠는데~?”
“어, 그래?”
동료는 만면에 희색(喜色)이 돌면서,
“말해 봐. 몇 명 정도 올 것 같아?”
나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100명이 목표라고? 안 연구원! 아니, 어, 1명만 모으면 되겠는데.”
“뭐라고, 1명? 이 친구 무슨 소리야 1명이라니? 그래 1명만 모아! 이 양반이 격려는 못 해줄망정 초를 쳐 초를?”
불같이 화를 냈다.
“안 연구원은 참 욕심도 많네. 무슨 100명씩이나 모으려고 그래.
1명만 모으면 되지.”
무시하고 비아냥거리는 투의 내 말에 그의 얼굴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진실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 기업세미나는 보통 1일짜리가 대부분이었고 외국의 석학碩學 같은 전문가를 초청하여 개최하는 경우가 아니면 보통 일일 참가비가 15만 원 정도였다. 그도 세미나 참가비를 16만 원으로 기획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16만 원이 아니라 ‘160,000만 원’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1명에 참가비가 16억인 것이다. 뒤늦은 지적에 얼굴이
사색이 된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금은 오자나 탈자가 있으면 온라인이나 홈페이지에 바로 수정을 하면 되지만 당시는 오로지 오프라인으로 안내장을 만들었던 시절이라 어떻게 수정할 방법이 없었다. 운 좋게도 팀장과 본부장님은 못 알아차리고 넘어갔다. 천만다행으로 참가문의나 신청을 하는 사람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일로 나는 한동안 그에게 공짜 술을 얻어먹었다.
그 이후에도 그는 종종 크고 작은 사고를 쳤다. 미국 연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나서 수익 정산을 했는데, 결산서의 항목에 항공료 원가를 1인당 항공료에 전체 참가자 수로 곱해야 함에도 그냥 1명으로 정산해 버리는 바람에 매출이익에 몇 천만 원의 차이가 발생하여 팀 월말 결산 때 모양새가 크게 빠지는 일까지 생겼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모 대학교 경영학과에서 인기 있는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K-BPIKorean-Brand Power Index 모델Model을 개발함으로써 마케팅 분야에 한 획을 그었다. 숫자가 절대적인 이 모델을 그가 개발한 것이다. 요즘도 그 젊었을 때의 일들을 더듬어 술자리에서 가끔 안줏거리로 삼곤 한다.
– 모든 것은 숫자로 관리하라.
–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은 믿지 않는다.
– 숫자를 꿰고 있는 관리자는 이미 논리(論理)를 갖춘 리더이다.
수數는 만국 공통의 알파벳이다. 리더가 구사해야 할 최고의 언어다. 그래서인지 대기업 CEO들의 출신 직군을 살펴보면 경영·경제나 재무·회계 부문 출신들 등 소위 곳간 관리 전공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조금 놀랄 것이다. 소위 기업의 살림꾼이 되는 전공이다.
숫자가 만국 공통의 알파벳이라는 소리를 하고 보니 영화 <매트릭스>가 떠오른다. 주인공 네오가 바라보는 영화 속 세상은 온통 숫자 천지이다. 『주역周易』의 대가였던 중국 북송北宋의 소강절邵康節은 세상 모든 현상을 숫자로 풀어내려 했었는데, 아마도 영화 속 네오가 1,0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소강절의 모습은 아니었을지….
네오와 소강절은 모두 기업의 리더가 될 자질이 충분한 인재들이다. 리더의 꿈을 품은 사람은 모름지기 숫자와 친해야 한다.
Great Place to Work 지방근
4 thoughts on “GWP 리더쉽 영웅 (58)/100 – 숫자 〔만국공통의 알파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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